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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ChatGPT 힘을 빌렸습니다. |
한때 동대문구는 서울 동북권의 중심이었다. 청량리는 부도심이었고 청량리역과 시장을 중심으로 사람과 물자가 모였다. 인접 지역 주민들이 장을 보러 오고, 기차를 타러 오고, 병원과 학교를 찾았다. 굳이 중심이라고 자랑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중심이었다.
지금도 동대문구가 가진 자산을 하나씩 펼쳐놓으면 결코 초라하지 않다. 청량리역이라는 광역교통의 요지가 있고 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라는 종합대학이 있다. 홍릉에는 각종 연구기관과 KAIST 서울캠퍼스, 홍릉숲 등이 자리하고 병원과 서울약령시, 경동시장·청량리시장 등 전국적으로 알려진 자원도 있다.
서울의 어느 자치구와 견줘도 쉽게 갖기 어려운 좋은 패다.
그런데 이상하다. 민선5기부터 8기까지 16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대문구도 분명 발전했다. 청량리의 스카이라인이 달라졌고 주거환경도 변했으며 교통망도 확충됐다. 그런데 주민이 느끼는 상대적인 도시 경쟁력에는 어딘지 모를 답답함이 남는다.
왜일까.
도시의 발전은 혼자 달리는 100m 경주가 아니다. 내가 어제보다 열 걸음 앞으로 갔다고 반드시 앞서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시간 옆 동네가 스무 걸음, 서른 걸음을 갔다면 거리는 오히려 벌어진다.
그래서 성동구와 중랑구를 바라보게 된다. 오늘의 성수를 보면 원래부터 화려한 곳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공장과 준공업지역이 있던 공간에 제조업과 IT, 스타트업, 소셜벤처, 문화·패션·상업이 겹쳐졌다. 민간의 움직임에 행정과 도시계획이 힘을 보태면서 이제 ‘성수’라는 이름 자체가 강력한 도시 브랜드가 됐다.
성동은 처음부터 모든 좋은 패를 가지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패를 제대로 키워 다른 패들을 불러들였다.
중랑구의 변화도 눈여겨볼 만하다. 과거 교통·상업·산업기반 등에서 동대문구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부족했던 것을 하나씩 채워가고 있다. 공공기관 이전과 복합개발, 산업·창업기반, 광역교통망 등 여러 성장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아직 진행 중인 사업도 많지만 적어도 어디로 가려는지는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그렇다면 다시 동대문구를 보자.
우리에게 정말 부족했던 것은 재료였을까. 청량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대학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연구기관과 병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전통시장과 역사·문화자원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은 재료는 남들보다 일찍, 많이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들을 얼마나 제대로 연결했느냐다. 청량리는 청량리대로, 홍릉은 홍릉대로, 대학은 대학대로, 전통시장은 시장대로 움직이지 않았는가. 하나하나는 전국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진주인데 정작 그것들을 ‘동대문구’라는 하나의 목걸이로 꿰는 데는 부족하지 않았는가.
청량리역이 대표적이다. 철도가 많이 지나고 GTX가 들어온다고 저절로 도시가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청량리를 ‘통과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청량리에서 ‘내려 머무느냐’다.
사람이 내려 일하고, 기업이 들어오고, 소비하고, 문화를 즐기고, 주변 상권으로 움직여야 한다. 청량리역이 주민을 강남과 도심으로 빨리 보내주는 역에 머문다면 훌륭한 교통허브는 될 수 있어도 경제허브가 되기는 어렵다. 교통을 기업과 일자리, 소비와 지역경제로 바꾸는 힘이 필요하다.
홍릉도 마찬가지다. 연구기관과 대학, 병원, 바이오·의료 자원이 모여 있다. 그러나 주민에게 “홍릉 때문에 어떤 기업이 들어왔고, 얼마나 많은 청년이 창업했으며, 어떤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는가”라고 묻는다면 얼마나 선명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연구기관이 많다고 연구도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연구가 기술이 되고, 기술이 창업으로 이어지고, 기업이 성장해 일자리를 만들고, 그 사람들이 지역에 살며 소비해야 비로소 연구단지가 지역경제가 된다.
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 역시 엄청난 자산이다. 수많은 교수와 연구자, 국내외 학생과 청년들이 매일 동대문구를 오간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얼마나 ‘동대문구의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졸업하면 떠나는 청년이 아니라 이곳에서 창업하고 일하고 살고 싶은 청년으로 붙잡았는가. 대학의 지식과 홍릉의 연구, 청량리의 교통과 업무기능을 하나의 산업생태계로 연결했는가.
여기에서 지난 16년이라는 시간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민선5·6·7기 유덕열 구정 12년에 이어 민선8기 이필형 구정 4년까지 16년이 흘렀다. 정당도 달랐고 구청장도 바뀌었다. 그동안 수많은 사업이 시작됐고 끝났으며, 성과를 낸 사업도 있었고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한 사업도 있었을 것이다.
16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이 16년을 어느 정당이나 어느 구청장의 공과를 재판하기 위한 시간표로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동대문구라는 도시가 걸어온 하나의 역사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잘됐는지, 무엇은 생각보다 더뎠는지, 어떤 정책은 계속 이어갈 가치가 있는지, 어떤 사업은 변화된 시대에 맞게 다시 설계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기록하고 다음 구정의 자산으로 남기는 것이다.
행정에도 복기(復棋)가 필요하다. 바둑이 끝나면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돌을 다시 놓아본다. 누구를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서 좋은 수를 두었고 어디에서 기회를 놓쳤는지를 알아야 다음 판을 더 잘 둘 수 있기 때문이다.
구정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공한 정책은 왜 성공했는지 기록하고,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 사업은 무엇이 부족했는지 살펴야 한다. 잘된 것은 정당이 달라도 이어가고 부족했던 것은 정당이 같아도 고쳐야 한다.
잘잘못을 기록하는 것은 과거를 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미래가 같은 시행착오의 값을 두 번 치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반성 없는 기록은 자랑에 머물고, 기록 없는 반성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기록이 쌓이면 경험이 되고, 경험이 쌓이면 정책의 지혜가 된다. 그것이 다음 행정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도시가 성장하는 동력이 된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하고 배우는 도시까지 반드시 같은 역사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현재 민선9기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구정이라고 지난 16년을 모두 지우고 백지에서 출발할 이유는 없다. 잘된 것은 이어받고 부족했던 것은 보완하며, 시대가 달라졌다면 과감하게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과거와의 단절도 아니고 무조건적인 계승도 아닌 진짜 혁신일 것이다.
그리고 동대문구 정치권의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그동안 동대문구에는 중앙정치와 서울시에서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힘센 정치인이 있었다’는 것과 ‘힘센 지역이 됐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지역 정치인의 힘은 명함에 적힌 직책이나 중앙의 누구와 가깝다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 힘으로 지역에 무엇을 남겼느냐가 중요하다.
중앙정치에만 매몰돼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큼 지역을 위해 정부와 서울시의 문을 두드리는 일에도 힘을 쏟아야 한다. 지역에서 얻은 정치적 힘이라면 그 힘의 상당 부분은 자신을 선택한 지역으로 돌아와야 한다.
소소한 생활사업 하나 해놓고 현수막부터 내걸며 ‘내가 했다’고 자랑하기보다, 지역의 판을 바꿀 큰 예산과 사업을 끌어오고 오랫동안 막힌 현안 하나라도 뚫어내는 정치가 필요하다.
주민은 현수막 숫자로 정치인의 힘을 판단하지 않는다. 청량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홍릉에 어떤 기업과 일자리가 들어왔는지, 교통과 교육·문화 인프라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이 지역에서 어떤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됐는지를 보고 판단한다.
중앙정치에서 목소리가 크다면 정부와 서울시의 문도 그만큼 크게 두드려야 한다. 국회의원이든 시의원이든 구의원이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지역발전 앞에서는 한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중앙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더라도 청량리와 홍릉, 교통과 기업, 일자리와 지역예산을 가져오는 일만큼은 함께 뛰어야 한다.
말로 하는 ‘힘센 정치’는 주민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현수막으로 자랑할 일이 아니라, 예산으로 가져오고 사업으로 남겨야 한다.
결국 동대문구에 필요한 것은 구청장이나 정당이 바뀔 때마다 새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정파를 넘어 이어갈 ‘10년, 20년 도시전략’이다.
청량리·전농은 업무와 상업의 중심으로, 홍릉은 연구·바이오·창업의 중심으로 키우고 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의 인재와 지식을 연결해야 한다. 경동시장·서울약령시·청량리시장의 오래된 상업기능에는 새로운 문화와 콘텐츠를 입혀야 한다.
청량리역에서 내린 청년이 홍릉의 기업에서 일하고, 대학에서 나온 기술이 지역에서 창업으로 이어지고, 성장한 기업이 다시 청년을 고용하고, 그 청년들이 동대문구에 살면서 지역에서 소비하는 도시. 따로 놓였던 진주를 하나의 목걸이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시간이 중요하다.
AI 시대가 빠르게 열리고 있다. AI와 바이오·첨단산업은 단순히 새로운 산업 하나가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기업이 모이는 곳에 인재가 모이고, 인재가 모이면 자본이 따라오며 다시 기업과 연구기관이 몰려드는 속도가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빨라지고 있다.
먼저 생태계를 만든 도시는 더 빨리 달리고, 한번 흐름에서 밀려난 도시는 따라잡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비용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의 몇 년은 지난 10년과 무게가 다를 수 있다.
과거의 경험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아 같은 시행착오를 또 하고, 다시 4년을 보내고, 다음 구정에서 또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그 사이 경쟁도시는 몇 걸음이 아니라 몇십 걸음 앞서갈 수 있다.
동대문구가 발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분명 발전했다. 그러나 성동도 달렸고 중랑도 달렸다. 발전은 내가 얼마나 앞으로 갔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남보다 얼마나 빠르게 변화했고 어느 방향으로 달렸느냐까지가 도시의 경쟁력이다.
한때 인접 자치구가 부러워했던 동대문구였다. 좋은 패도 아직 손에 있다. 청량리가 있고 경희대·한국외대·서울시립대가 있다. 홍릉과 연구기관, 병원과 숲이 있고 전통시장과 광역교통망도 있다.
좋은 패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패를 제대로 써볼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
민선5기부터 8기까지 16년이 흘렀고 이제 민선9기가 시작됐다. 주민들이 요구하는 것은 과거를 재판하라는 것이 아니다. 지난 16년의 경험을 제대로 기록하고, 잘된 것은 더 키우고, 부족했던 것은 보완해 이제는 확실한 미래의 그림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정치권에도 요구한다. 중앙의 정치싸움에만 매몰되지 말고 동대문구를 위해 더 치열하게 뛰어달라는 것이다. 소소한 사업 하나에 현수막부터 내걸기보다 정부와 서울시에서 큰 예산을 가져오고, 굵직한 사업을 끌어오고, 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당을 위한 요구도, 어느 정치인을 겨냥한 요구도 아니다. 동대문구가 다시 앞서기를 바라는 주민들의 당연한 요구이고 희망이다. 우리는 ‘한때 잘나갔던 동대문구’를 추억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시 앞서가는 동대문구에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정치권도 결과로 경쟁하라.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아니라 누가 더 많은 예산과 사업을 가져왔는지, 누가 더 큰 기업과 일자리를 만들었는지, 누가 오랫동안 막힌 지역의 숙원을 해결했는지를 놓고 경쟁하라. 그런 경쟁이라면 주민들은 얼마든지 박수를 보낼 것이다.
AI 시대의 도시 경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때 동북권의 중심이었던 동대문구가 다시 중심으로 올라설 것인가, 아니면 역사 속에 ‘한때’라는 두 글자만 남길 것인가. 그 갈림길이 바로 지금이다.
機不可失 時不再來
기불가실 시불재래.
“기회는 놓쳐서는 안 되고,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16년의 경험을 과거의 짐으로 남길 것인가, 미래의 자산으로 바꿀 것인가. 그 답은 이제 민선9기와 동대문구 정치권이 함께 보여줘야 한다.
말로 힘을 자랑하지 말라. 현수막으로 성과를 자랑하지 말라. 정말 힘이 있다면 예산으로 가져오고, 사업으로 끌어오고, 기업과 일자리로 남겨라.
그리고 10년 뒤 주민들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하라. “그때, 동대문구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고.
“한때의 중심에서, 다시 동북권의 중심으로! 동대문, 다시 뛰자!”
[동대문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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