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중국 오나라에 계찰(季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사신으로 길을 떠난 계찰은 서나라의 군주를 만났다. 서군은 계찰이 차고 있던 검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지만 달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계찰은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이 검을 드려야겠다.’ 그러나 여러 나라를 방문하는 사신의 몸이라 그 자리에서 검을 풀어줄 수는 없었다.
모든 일을 마친 뒤 계찰은 약속대로 다시 서나라를 찾았다. 그런데 그사이 서군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검을 받을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이제 누구에게 검을 주시려는 겁니까?”라고 묻자, 계찰은 말없이 서군의 무덤을 찾아갔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무덤가 나무에 걸었다.
사람들이 다시 물었다. “살아 있는 사람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귀한 검을 두고 가십니까?” 계찰은 담담히 답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내 마음까지 바꿀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이 검을 드리기로 했네.”
季札掛劍
계찰괘검.
‘계찰이 검을 걸다.’
생각해보면 참 묘한 이야기다. 서군은 검을 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계찰 역시 입 밖으로 “드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더구나 이제는 그 약속을 확인할 사람조차 세상에 없다. 검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간들 누가 알았겠는가. 누가 계찰을 손가락질했겠는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알고 있었다. 계찰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검을 걸었다.
의리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지키는 것, 상대가 힘이 있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게 되었을 때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 것. 계찰은 검 한 자루를 내려놓았지만, 그 빈 허리에는 수천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신의(信義)’라는 이름 하나가 남았다.
사람이 떠났다고 약속까지 떠나는 것은 아니며, 세월이 흘렀다고 의리까지 낡는 것도 아닌 모양이다.
季札掛劍
계찰괘검
“보는 사람이 없어도, 내 마음은 알고 있다.”
문득 오늘의 정치를 바라보며 묻게 된다. 선거 전 다급했던 부탁과 약속을 선거가 끝난 뒤에도 기억하고 있는가. 힘이 있을 때 찾아온 사람뿐 아니라, 힘들 때 곁에 있었던 사람도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더라도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때의 약속과 의리를 지켰노라.”
오늘 우리 정치인들의 허리에도, 아직 내려놓지 못한 ‘계찰의 검’ 한 자루쯤 남아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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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인다. |
[동대문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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