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고을에 새 원님이 부임했다.
원님이 좋아하는 색깔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어떤 아전은 그 색깔의 목도리를 둘렀고, 또 어떤 이는 대문을 그 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소문은 금세 퍼졌고, 어느새 고을 곳곳의 깃발도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정작 바뀌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백성들의 삶이었다.
생각해 보면 조직이 병드는 것은 큰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윗사람의 뜻을 살피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눈치 보기로 변하고, 눈치 보기가 아첨으로 변하고, 아첨이 충성으로 포장되기 시작하면 조직은 서서히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다.
조선시대의 토정(土亭) 이지함은 수령으로 부임한 뒤 관아를 꾸미기보다 백성의 삶을 먼저 살폈다고 전해진다. 그는 창고와 문루보다 시장을 먼저 둘러보았고, 형식보다 민생을 앞세웠다.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고을을 다스리는 첫걸음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또 동대문구 하정로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하정(荷亭) 유관 선생은 청백리의 표상으로 전해진다. 벼슬은 높았지만 사사로운 이익을 탐하지 않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는 것을 관리의 본분으로 삼았다. 훗날 그의 이름이 길 이름으로 남은 것도 권세 때문이 아니라 바른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대는 달랐지만 공통점은 하나였다.
윗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 백성의 삶을 먼저 보았다는 점이다.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 윗사람의 표정부터 살피고, 주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이 상사의 눈빛부터 읽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대문은 화려해져도 집 안은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의 공직자들은 묵묵히 맡은 일을 하며 주민을 위해 애쓴다. 하지만 조직의 공기는 소수의 행동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새로 부임하는 수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건물을 새로 짓거나 깃발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눈치보다 원칙이, 아첨보다 실력이, 충성 경쟁보다 주민을 위한 성과가 존중받는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다.
춘향전에서 암행어사가 변학도의 잔치에 나타나 읊었다는 시가 있다.
金樽美酒千人血
금잔의 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
玉盤佳肴萬姓膏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燭淚落時民淚落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지고
歌聲高處怨聲高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또한 높구나
비록 옛이야기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교훈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6·3 지방선거를 통해 전국 곳곳에 새로운 원님들이 들어섰다.
결국 좋은 고을은 깃발의 색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좋은 조직 또한 윗사람의 취향이 아니라 주민의 삶을 먼저 바라볼 때 비로소 건강해진다.
깃발은 바람 따라 흔들리지만, 나침반은 북쪽을 잃지 않는다.
대문의 색보다 중요한 것은 백성의 얼굴빛이고, 깃발의 색보다 중요한 것은 조직의 방향이다.